두부 요리, 부침개 등을 그냥 먹기 찝찝하신 분들… 저 처럼 양념장을 찍어 드셔야 맛을 더 느끼시는 분이 계신가요?

양념장을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요리의 대가 백순옥 여사를 찾아 배워 왔습니다.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 나중에 제가 참고하려고 하는데요, 혹시 다른 분들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여기에 포스팅 해봅니다.

1) 실파를 구입하셔서 잘게 썰어둡니다.

2) 몽고간장을 준비하세요. 아니면 일본간장도 좋습니다.

3) 몽고간장과 실파 썰은 것을 잘 버무려 주세요.

4) 고춧가루를 한 숫가락 넣어주세요.

5) 고소한 참깨를 넣어주세요.

6) 참기름을 한 숫가락 넣어주세요. 안넣어도 별 지장 없지만 넣으면 더 고소해집니다.

7) 잘 버무려주세요…

이제 준비 완료… 이제 두부와 부침개는 이 양념장으로 모두 커버하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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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5월 29일 올챙이 3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그리고 주변 화원에서 개구리밥 2개를 구입하여 조그만 수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그냥 마시기엔 찝찝하다는 것이 제 답변입니다.

올챙이 3마리는 수조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잘 사는 것 같았습니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면서 체험학습을 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기대가 많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올챙이는 살아 있었습니다. 아… 서울특별시 수돗물 믿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3일이 지나니 올챙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저희 아파트 단지의 다른 집에서는 물을 올챙이가 살던 곳에서 계속 퍼다 날라다 기른다고 하더군요. 저희 집도 그랬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느낀 점… 서울특별시 상수도 물은 그냥 마시기엔 찝찝하다… 입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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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와 소프트뱅크가 통큰 클라우드 동맹을 하겠다고 합니다.

2011년 5월 31일자 중앙일보에는 이와 관련된 기사가 사진과 함께 떴습니다. 총 비용은 약 700억원 규모이며 소프트뱅크(손정의)와 KT(이석채)가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클라우드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KT는 기간망 사업자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예측해 봅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소프트뱅크가 데스크톱 가상화(Desktop Virtualization)를 본격적으로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며, KT는 이에 대한 인프라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최근 시트릭스 CEO 마크 템플턴이 주장한것처럼 데스크톱 가상화가 가시화 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렇게 되면 향후 IT 인프라의 중심은 클라우드가 장악을 하게 될 것이고, 이를 사용하기 위한 어플리케이션은 씬클라이언트(Thin Client)형태로 존재하여 디바이스의 가격을 줄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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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트랜드는... 퍼스널 클라우드가 개인 스토리지에 집중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트랜드는 변하고 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지시간 2011년 5월 27일 시트릭스(Citrix) CEO 마크 템플턴은 시트릭스 시너지 행사에서 보다 많은 사용자들이 가상 업무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퍼스널 클라우드” 비젼을 발표 했습니다.

마크 템플턴은 데스크톱 가상화(Desktop Virtualization)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며 곧 시장의 트렌드가 될 것임을 언급하였습니다.

데스크톱 가상화(Desktop Virtualization)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지금 껏 비싼 돈을 주며 투자했던 PC는 점점 더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PC의 기능은 점점 더 Light해 지게 되며, 이 때문에 가격도 떨어지게 됩니다.

마크 템플턴이 언급한 퍼스널 클라우드 시대에 대비하려면 1)사용자와 PC, 맥, 스마트폰, 태블릿 등 사용자 디바이스 지원, 2)자원 위치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디맨드로 앱과 데스크탑을 안전하게 딜리버리, 3)비즈니스 문서와 파일 등의 데이터를 읽기, 편집, 저장, 보안하는 장소나 방법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어떤 디바이스에서 쉽고 끊김 없이 제공 4)사람들이 어디서든 가상적으로 만나 협업하는 방식이 가장 관건이 될 것입니다.

미래의 컴퓨팅 환경… 어찌 발전하고 변할지 기대되네요.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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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운전은 낮이든 밤이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1년 5월 말…
경기도 고양시에서 서울시로 진입 중 음주운전 단속을 받았습니다.

물론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 것을 보고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차를 빼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러나 서울특별시 경찰들은 이를 봐주지 않습니다.

서울로 진입하는 입구 하나 하나에 경찰을 배치하여 음주단속을 했습니다.

차가 그리 막히지는 않았습니다만 음주운전 단속은 매우 치밀해 보였습니다.

음주운전 하지 맙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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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 이외의 지역을 자동차로 간다고 한다면…
그곳이 시골이라면…
아마 걱정들 많이 하실 것입니다.

특히 컴컴한 밤중에 신호등이 있더라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신호등을 건넌다면
아마 운전자 눈의 띄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1년 5월 28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효자2동 근처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대기하며 찍은 사진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횡단보도가 다른 곳에 비해 몇 배는 더 밝게 보이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어두운 시간이 지나서 더 컴컴한 곳을 가더라도 횡단보도 만큼은 위와 같이 밝게 비추어 줍니다.
제가 실제로 운전 하면서 느낀 점은,
신호등 보다 위와 같은 조명 시설이 있어서 더 긴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전기요금 낭비가 아니냐고 말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히려 위와 같은 장치는 운전자와 보행자 모두를 보호하는 훌륭한 장치임에 틀림 없습니다.
저는 저런 안전장치를 통해 교통사고 한 건을 줄이는 편이 국민에게는 진정한 복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고양시를 지나 바로 서울로 진입하면… 위와 같은 안전장치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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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 어느 전시장에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는 동화책 표지인데, 공주님이 정말 졸려 보이죠?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엔 좀 무서운 표지 아닌가요?

 

어른의 눈 높이와 아이들의 눈 높이는 다르니까… 위의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 궁금하네요.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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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에게는 44명정도의 아들이 있는데 이중 역사책에 많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명정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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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풍(扶餘豊, 630경? ~ 669년)

백제의 제32대왕 백제 풍왕(豊王)(660년~661년)이고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합니다.

부여풍은 볼모로 왜(일본)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자,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60년 의자왕 외 2천 귀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백제로 왔습니다.

이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등의 내분이 발생하자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 부흥연합은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세력 또한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여풍은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를 하였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선광(善光 또는 禪廣 : 일설에는 동생이라고 함)은 일본에 남았으며,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2)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부여륭. 615~682)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며 644년(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습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습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司稼卿)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저항하는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3) 부여용 (扶餘勇) 생몰년 미상.

백제의부흥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663년 9월의 이른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왜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의 패전 후 고구려로 망명한 형인 부여 풍(扶餘豊)과 내응(內應)하면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는 664년 4월에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백제유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고구려 정벌을 위한 후고(後顧)를 덜기 위하여 관계개선을 시도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고합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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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조언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충남 공주)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죽음)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의자왕과 계백장군

 

의자왕의 발자취를 연도별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32년 1월, 태자로 책봉됨
642년 2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시킴
642년 7~8월,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킴
64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함
644년 7월, 왕자 융을 태자로 책봉함
645년 5월,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음
647년 10월,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함
648년 3월, 신라의 10여개성을 빼앗았으나 김유신에게 패배함
649년 8년,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함
653년, 기근이 들고 왜국과 화친함
655년, 망해정과 마천성을 중수하고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함
660년, 백제 멸망 및 의자왕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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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장군은 당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는데,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렀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게 되는데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습니다.

Posted by 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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