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부대를 이끌고 백제와 마지막 전투 황산벌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계백은 가족까지 죽이는 비장한 각오로 나왔기에 5천밖에 안되는 백제군이었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4번싸워 4번모두 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당나라 소정방부대와 만나기로 한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김품일이라는 장군은 아들 관창에게 지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 할 수 있는 2가지를 모두 할수 있으니 어찌 맞서 싸우지 않겠느냐 며 돌려하자... 관창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가 계백에서 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계백은 관창이 어린나이임을 알고 살려보내줬으나 관창은 세속오계에서처럼 임전무퇴를 외치며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사로잡힙니다...
이에 계백은 관창을 칭찬하며 아깝지만 목을 베어 말에 목을 달아 적진으로 보냅니다..
이에 관창의 용기에 감탄한 신라군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여기에서 주목할것은 단지 화랑이었던 관창의 죽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가 장군이었고 힘이 세어서 요술을 부려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여자가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관창의 죽음 또한 어린 화랑도 목숨을 바쳐 싸우는데 자기 몸을 사리던 신라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싸움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관창의 능력보다 관창의 용기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계백이 가족을 죽이면서 나와 5천 결사대로 5만을 맞설 수 있었듯이...
관창의 죽음 또한 한명의 죽음이상의 큰 힘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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