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의 기본정신은 세속오계입니다.

 

세속오계는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을 의미합니다.
이 세속오계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습니다

사군이충 -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김.
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기기를 효도로써 함.
교우이신 - 벗과 벗 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함.
임전무퇴 - 싸움에선 절대 물러나지 아니함.
살생유택 -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아니함.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합니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김유신은 5만의 부대를 이끌고 백제와 마지막 전투 황산벌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계백은 가족까지 죽이는 비장한 각오로 나왔기에 5천밖에 안되는 백제군이었지만...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김유신은 4번싸워 4번모두 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당나라 소정방부대와 만나기로 한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김품일이라는 장군은 아들 관창에게 지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 할 수 있는 2가지를 모두 할수 있으니 어찌 맞서 싸우지 않겠느냐 며 돌려하자... 관창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가 계백에서 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계백은 관창이 어린나이임을 알고 살려보내줬으나 관창은 세속오계에서처럼 임전무퇴를 외치며 다시 적진으로 들어가 사로잡힙니다...

이에 계백은 관창을 칭찬하며 아깝지만 목을 베어 말에 목을 달아 적진으로 보냅니다..

이에 관창의 용기에 감탄한 신라군들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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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주목할것은 단지 화랑이었던 관창의 죽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에서 잔다르크가 장군이었고 힘이 세어서 요술을 부려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여자가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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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창의 죽음 또한 어린 화랑도 목숨을 바쳐 싸우는데 자기 몸을 사리던 신라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싸움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관창의 능력보다 관창의 용기가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계백이 가족을 죽이면서 나와 5천 결사대로 5만을 맞설 수 있었듯이...

관창의 죽음 또한 한명의 죽음이상의 큰 힘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손에 든 촛불로 투탕카멘의 무덤 안을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안은 온통 황금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카터와 그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의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그 무덤 안의 엄청난 보물과 황금 마스크 그리고 황금 관. 모두 값으로는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덤 안의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이런 말이 나왔다.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


투탕카멘은 이크나톤 왕의 후계자였다. 이크나톤 왕은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여 이크타톤이라고 명명하였다. 왕은 유일신을 숭배했는데, 신하들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이크나톤이 젊은 나이로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사위라는 설도 있음) 투탕카멘에게 넘겨졌다. 그는 종교를 원래대로 복원하고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겼다. 그는 20살이 채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위 높은 승려 중에 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투탕카멘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미망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는 4년도 못 되어 평민출신의 호렘헵이라는 장군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이집트의 왕이 된 호렘헵은 독재자로 변했다. 그는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했다. 또 그는 태양신을 모신 대사원의 돌을 운반해 테베의 피라미드 축조에 이용했다. 게다가 그는 아이왕과 투탕카멘 시대의 신하들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파헤치지 않았다. 호렘헵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손대지 않고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은 카나본 경은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파라오의 저주가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본 경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 노파 점쟁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노파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본 경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 발굴에 착수하게 된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이듬해인 1923년 4월 5일,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본 경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맞는다. 무덤에 손을 댄 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조사한 의사들은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뺨에 물린 자국과 투탕카멘 미이라의 왼쪽 뺨에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카나본 경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본 경의 개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의 죽음 이후 1929년까지 무덤의 발굴에 관여하였던 21명이 생을 마감했다. 1923년 9월 카나본 경의 조카 오베리 허버트가 갑자기 죽음을 당했다.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이집트의 방사선 사진기자 투탕카멘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 아티볼트 더글라스 라이드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의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무덤에 들어갔던 그 다음날 아침 고열을 앓다가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덤의 현실 벽을 마지막으로 깨뜨린 카터의 조수였던 미국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는 어느날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 이집트인 알리 케멜 화미 베이는 무덤을 본 후 자신의 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조지 방디트 역시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사망했으며, 카나본 경의 부인도 벌레에 물려서 1929년에 사망했다. 카터의 비서 리처드 베텔은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그의 아버지 웨스트베리 경은 무덤을 보지는 않았지만 투탕카멘의 유물을 몇 가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사망한 후 곧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영구차에 8세의 아이가 치여 죽기도 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검사한 두 의사 중 한 사람인 더글라스 데리 교수는 1925년에 죽었다. 또 한 사람의 의사인 앨프리드 루카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이집트 학자인 라플 교수와 화이트 교수도 의문의 자살을 하고 말았다. 카나본 경의 비서와 발굴 당시 초청 인사였던 사람들도 모두 죽어갔다. 모두 하나 같이 원인 불명의 병이나 사고로 죽어갔다. 과연 편안히 잠든 어린 파라오를 깨워 그의 저주가 실현된 것인가?

카이로 박물관의 고대 유물 부분의 책임자 네레트 박사는 '저주'라는 말을 일축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인생의 전부를 파라오의 묘와 미라 연구에 바쳤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저주가 근거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레트 박사는 그 말을 한 지 4주일 후에 폐허탈로 급사했다. 1969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대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애덤슨이 영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은 한 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 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또한 그 사고 이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도 등뼈를 다쳤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가정에 닥친 모든 불행이 파라오의 저주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1972년 투탕카멘의 유물을 영국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송 작업을 지휘하던 가멜 메레즈도 파라오의 어리석은 전설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 후 그 날 밤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물들을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6명은 그 후 5년 사이에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며 지금까지 약 30여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발굴단의 사인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3000여 년 동안 벽에 붙어서 기생하던 곰팡이 혹은 박테리아가 공기를 통해 사람의 폐로 들어 왔기 때문이라던가 무덤 안의 강력한 독이 피부에 스며들어 죽었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완벽하게 뒷받침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방사선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묘지 바닥이 우라늄을 포함한 돌이거나 아니면 방사선을 내는 바위로 무덤의 끝손질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 역시 문제점이 있었다.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에 관련된 1500여명 가운데 10년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 자연사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조차 파라오의 저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증거로는 무덤의 개봉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다.

사실 파라오의 저주가 존재한다면 제일 먼저 사망했어야 할 사람이 바로 카터였다. 또한 카터와 카나본 경과 함게 무덤을 열거나 유물을 옮겼던 사람들도 평균 26년 후에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언론계와 카나본 경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은 발굴 자금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런던의 신문인 타임즈지를 상대로 발굴에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는 약속을 하고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엄청난 특종을 눈 앞에 두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야 기사를 쓸 수 있었던 전 세계 언론의 거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카나본 경이 일찍 죽게 되자 감정이 좋지 않던 언론에 의해 '저주'는 과대포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파라오의 저주는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보다. 파라오의 저주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최영장군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기신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최영장군은 고려말의 충신으로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으며, 1361년에는 홍건족들이 고려땅을 침범하자  토벌하였고  1376년 왜구가  남해안을  침략하자  토벌한 역대 명장이고 고려를 위래 죽은 충신중의 충신이시기도 하죠.

다음은 북한에서 발행한 최영장군 우표입니다.

애국명장의 칭호를 붙여서 만든 우표군요.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진평왕이 승하했는데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의 딸인) 덕만(德曼:선덕여왕)을 왕으로 세웠다”라고 썼고, 일연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고 쓴 이래 이 설명이 정설이 되어왔다.

한 마디로 선덕여왕은 성골의 핏줄 때문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단지 성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국왕이 되었음을 전해준다.

또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진평왕의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에게는 천명(天明)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신라 제27대 왕,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신라뿐 아니라 기록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인데, 덕만은 불교식 이름으로 『열반경』에 등장하는 오계를 갖춘 재가 여신도이며 부처의 열반을 지켜보았다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이고 어머니는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며 자매로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혼인하여 김춘추를 낳은 천명부인이 있다. 또한 ‘서동요’설화에서는 백제로 가서 무왕의 비가 되었다고 하는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셋째딸이라 하여 선덕여왕의 자매로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 기록을 믿기 어려운 점은 또 있다. 즉, 진평왕의 딸이 세 명으로 정사 기록대로 첫째 딸이 선덕여왕이고, <삼국유사> 말대로 셋째가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면 둘째 딸이 선덕여왕 다음 왕으로 즉위해야하나, 그 어떠한 말도 없다는 점이다. 선덕여왕 다음으로 왕이 되는 승만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 아니라 덕만(선덕여왕)과 4촌이라는 점이다. 고로 선화공주가 진평왕 셋째 딸이라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기이편(奇異編) 설화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여왕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외에 두 명이 있었다. 제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통일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 제51대 진성여왕(887~897)이다. 이 세 여왕은 모두 신라의 여왕이다.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신라의 정치, 사회적 특징은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여왕의 존재를 낳게 한다. 먼저, 그 이유가 바로 신라사회에서만 존재했었던 골품제의 영향이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자가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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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예지력을 가지고 있엇다고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첫번째 설화(일화) '향기 없는 모란꽃'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모란꽃씨가 있었는데..
모란꽃 그림에 나비나 벌이 없음을 알고 모란씨에..
향기가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고..
그 모란꽃씨를 심으니까.. 역시나 향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어떻게 맞추었냐고 하니까..
꽃그림에 나비가 없었다고 하고 그것은 곧 자신을 풍자한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옵니다..

 

두번째 설화(일화) '개구리 이야기..'

이것과 향기없는 모란꽃 은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데요...
다만 모란꽃 이야기는 자신의 아버지 진평왕에게 말햇고..
개구리 이야기는 여문곡이 아니라 옥문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쳣다고 하네요..
겨울에 겨울잠을 자고 있을 개구리가..
3~4일을 계속울자.. 그곳에 적군이 숨어있다는 징조임을 알고..
군사들을 풀어 그곳을 뒤지게 하자
과연 백제군이 숨어있어. 물리쳣다고 하네요..
여기가 여문곡으로 나와있는데.. 진짜로는 옥문곡이라고 합니다..

 

세번째 설화(일화)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때는 자기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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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프랑스 혁명은 가장 전형적인 시민 혁명으로 평가된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으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 사회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또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전근대 사회의 낡은 사고 방식이 이성에 의거한 계몽 사상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혁명은 모든 구별이나 차이를 넘어선 모든 사람의 자유를 뜻하는 자유, 법적인 평등에서 나아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을 포함하는 평등, 나아가 세계 평화의 이념인 박애의 이념을 내걸고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제도와 절대 왕정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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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대립하고 루이16세를 처형을주장한 자코뱅이승리 지롱드파는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몰수를당한다 그리고 자코뱅의 대표인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가시행되지만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인해 로베스피에르도 죽는다

그 다음 포병장교출신인 나폴레옹이 점차 힘을키우고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되지만

잦은 전쟁으로 정예병들이죽고 영국상륙이 물거품이되고 러시아정벌이 실패하자 물러나고 다시 왕정이 들어서지만 2월혁명으로 끝내 공화정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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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6세는 이것을 반항하는 단체라생각 군대를 동원해 해산하려고했다.

허나 미라보가 루이16세의 시녀로부터 듣고 미국독립전쟁때 장군으로 활약한 라파예트를 중심으로 민병대를 만들어 봉기를 호소하고 바스티유를 습격 점령한다.

그 후 루이16세는 모든것을 국민의회에 맡기지만 앙투아네트의 제안으로 오스트리아로가던중 잡혀 파리에 감금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왕은 자기의 동생인 앙투아네트가위험하자 프러시아와함께 군대를 이끌고간다 허나 프랑스가 불리했지만 마르세이유 민병대등 각지에서 모여든 군사로 승리하여 국민공회는 루이16세는 국민의적이라하여 처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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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6세때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하자 루이16세는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할려하였다  허나 귀족들의 반대로 할수없이 삼부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예전에 시민들이 아니였다 시민들은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를 거쳐서 각자만의 부를 축척하고 지식이 유능한 시민들이 늘었던 것이였다.

허나 삼부회 투표방식으로 인한 충돌로 어차피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갈것...

그래서 라파예트와 미라보를 중심으로 테니스 코트장에서 국민의회를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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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부터 시작된 절대왕정국가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루이14세는 사냥시 들리는 별장을 고쳐 베르사유궁전으로 짓는가하면 세금도 과하고 종교전쟁으로인해 엄청나도 많은 군인이죽었다.

허나 루이16세와 앙투아네트 그리고 귀족들은 아랑곳안하고 노는데만 바빳다.

특히 루이16세는 매일같이 연회와 만찬회를 하며 귀족들과 편안한 생활을한다.

그리고 프랑스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 모든돈을 부과하고 귀족 성직자는 놀고 배불리기에만 바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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