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백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문화유적지라고 합니다. 예전에 웅진이라고도 불리웠던 곳이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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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무녕왕릉만 가려고 그랬는데, 다른 볼거리가 많이 있는 것 같네요.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cyber.gongju.go.kr/hpg/tur/cnt/ComvncntntsList.do?menuId=MNU_0000000000000052&cntntsTy=TRRSRT

장수왕은 고구려 20대 왕이며 향년 98세(394년~491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고 하였고 중국의 진(晉)나라·송(宋)나라·위(魏)나라 등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며 북아시아 여러 세력들과도 다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서방(西方)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외교관계를 기반으로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습니다.

연대별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408년 태자로 책봉

414년 자신의 아버지인 담덕(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움

427년 만주 지방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함

475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여 옛날 고국원왕의 원한을 갚음.

480년 말갈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함

광개토대왕 장수왕 2대에 걸친 정복사업으로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재위 79년, 나이 98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수왕의 업적 요약
1.도읍지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김
2.남하정책으로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넓힘

한반도를 호령했던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의 연대별 업적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374년 탄생, 이름은 담덕
386년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됨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이 됨, 고구려 최초로 연호(영락)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고 관미성도 함락됨
392년 백제 북쪽 10개의 성(황해도지역)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함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진무가 이끄는 백제1만대군을 막아냄.
394년 고구려 남쪽의 수곡성이 위기에 쳐했으나, 정예기병을 보내 막아냄
396년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함
398년 숙신을 정복하고 신라를 굴복시킴. 이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침.
399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친입. 이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왜와 백제를 격파    
        고구려군이 남쪽에 있는동안 침략해온 북쪽의 후연군에 반격을 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회복함.
404년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함.
405년 요동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6년 목저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7년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킴.
410년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함.
412년 39세의 나이로 사망.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 외 사람들이 지은 역사서로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김부식은 신라 김씨의 자손으로, 신라를 위주로 서술하였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건국된 시기가 제일 앞서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나 혹은 중국의 사서를 볼 때 고구려, 백제가 건국시기가 앞설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김부식이 신라를 중요시하여 왜곡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된 역사서입니다.
기전체는 본기, 세가, 열전, 연표, 등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기전체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서 본기는 황제국의 역사,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 열전은 왕들 외의 인물들의 전기라고도 합니다.
조선 때의 고려사를 편찬한 것을 보면, 고려는 제후국이라 해서 세가에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보다는 주체적인 인식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본기로 썼습니다.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에게는 44명정도의 아들이 있는데 이중 역사책에 많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명정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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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풍(扶餘豊, 630경? ~ 669년)

백제의 제32대왕 백제 풍왕(豊王)(660년~661년)이고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합니다.

부여풍은 볼모로 왜(일본)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자,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60년 의자왕 외 2천 귀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백제로 왔습니다.

이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등의 내분이 발생하자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 부흥연합은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세력 또한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여풍은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를 하였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선광(善光 또는 禪廣 : 일설에는 동생이라고 함)은 일본에 남았으며,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2)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부여륭. 615~682)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며 644년(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습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습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司稼卿)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저항하는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3) 부여용 (扶餘勇) 생몰년 미상.

백제의부흥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663년 9월의 이른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왜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의 패전 후 고구려로 망명한 형인 부여 풍(扶餘豊)과 내응(內應)하면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는 664년 4월에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백제유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고구려 정벌을 위한 후고(後顧)를 덜기 위하여 관계개선을 시도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고합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조언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충남 공주)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죽음)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의자왕과 계백장군

 

의자왕의 발자취를 연도별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32년 1월, 태자로 책봉됨
642년 2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시킴
642년 7~8월,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킴
64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함
644년 7월, 왕자 융을 태자로 책봉함
645년 5월,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음
647년 10월,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함
648년 3월, 신라의 10여개성을 빼앗았으나 김유신에게 패배함
649년 8년,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함
653년, 기근이 들고 왜국과 화친함
655년, 망해정과 마천성을 중수하고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함
660년, 백제 멸망 및 의자왕 사망

계백장군은 당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는데,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렀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게 되는데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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