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에게는 44명정도의 아들이 있는데 이중 역사책에 많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명정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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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풍(扶餘豊, 630경? ~ 669년)

백제의 제32대왕 백제 풍왕(豊王)(660년~661년)이고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합니다.

부여풍은 볼모로 왜(일본)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자,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60년 의자왕 외 2천 귀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백제로 왔습니다.

이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등의 내분이 발생하자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 부흥연합은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세력 또한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여풍은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를 하였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선광(善光 또는 禪廣 : 일설에는 동생이라고 함)은 일본에 남았으며,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2)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부여륭. 615~682)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며 644년(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습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습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司稼卿)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저항하는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3) 부여용 (扶餘勇) 생몰년 미상.

백제의부흥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663년 9월의 이른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왜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의 패전 후 고구려로 망명한 형인 부여 풍(扶餘豊)과 내응(內應)하면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는 664년 4월에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백제유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고구려 정벌을 위한 후고(後顧)를 덜기 위하여 관계개선을 시도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고합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조언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충남 공주)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죽음)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의자왕과 계백장군

 

의자왕의 발자취를 연도별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32년 1월, 태자로 책봉됨
642년 2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시킴
642년 7~8월,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킴
64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함
644년 7월, 왕자 융을 태자로 책봉함
645년 5월,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음
647년 10월,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함
648년 3월, 신라의 10여개성을 빼앗았으나 김유신에게 패배함
649년 8년,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함
653년, 기근이 들고 왜국과 화친함
655년, 망해정과 마천성을 중수하고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함
660년, 백제 멸망 및 의자왕 사망

계백장군은 당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는데,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렀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게 되는데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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