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1월 26일,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손에 든 촛불로 투탕카멘의 무덤 안을 작은 구멍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안은 온통 황금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카터와 그의 후원자인 카나본 경의 위대한 발견의 순간이었다.

그 무덤 안의 엄청난 보물과 황금 마스크 그리고 황금 관. 모두 값으로는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무덤 안의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이런 말이 나왔다.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벌이 내릴 것이다."


투탕카멘은 이크나톤 왕의 후계자였다. 이크나톤 왕은 새로운 곳에 수도를 건설하여 이크타톤이라고 명명하였다. 왕은 유일신을 숭배했는데, 신하들은 이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이크나톤이 젊은 나이로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사위라는 설도 있음) 투탕카멘에게 넘겨졌다. 그는 종교를 원래대로 복원하고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겼다. 그는 20살이 채 되지 않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위 높은 승려 중에 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투탕카멘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미망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는 4년도 못 되어 평민출신의 호렘헵이라는 장군에게 왕위를 물려 준다. 이집트의 왕이 된 호렘헵은 독재자로 변했다. 그는 아크나톤과 투탕카멘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했다. 또 그는 태양신을 모신 대사원의 돌을 운반해 테베의 피라미드 축조에 이용했다. 게다가 그는 아이왕과 투탕카멘 시대의 신하들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파헤치지 않았다. 호렘헵은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서 투탕카멘의 무덤을 손대지 않고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투탕카멘의 묘가 발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보를 받은 카나본 경은 당시 유명한 신비론자인 하몬 백작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파라오의 저주가 내려지면 틀림없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카나본 경은 유명한 점쟁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 노파 점쟁이의 점괘도 죽음이었다. 노파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충고를 듣지 않고 카나본 경은 이집트에 도착하여 카터와 무덤 발굴에 착수하게 된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한 이듬해인 1923년 4월 5일,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카나본 경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맞는다. 무덤에 손을 댄 지 약 5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의 죽음을 조사한 의사들은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 합병증을 일으켜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의 왼쪽 뺨에 물린 자국과 투탕카멘 미이라의 왼쪽 뺨에 벌레 물린 자국이 일치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카나본 경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나본 경의 개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의 죽음 이후 1929년까지 무덤의 발굴에 관여하였던 21명이 생을 마감했다. 1923년 9월 카나본 경의 조카 오베리 허버트가 갑자기 죽음을 당했다. 미라를 조사하기 위해 이집트의 방사선 사진기자 투탕카멘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기자 아티볼트 더글라스 라이드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카나본 경의 절친한 친구였던 미국의 철도계의 거물 제이 굴드는 무덤에 들어갔던 그 다음날 아침 고열을 앓다가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무덤의 현실 벽을 마지막으로 깨뜨린 카터의 조수였던 미국의 고고학자 아서 메이스는 어느날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이했다. 이집트인 알리 케멜 화미 베이는 무덤을 본 후 자신의 처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조지 방디트 역시 무덤을 방문한 후 갑자기 사망했으며, 카나본 경의 부인도 벌레에 물려서 1929년에 사망했다. 카터의 비서 리처드 베텔은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그의 아버지 웨스트베리 경은 무덤을 보지는 않았지만 투탕카멘의 유물을 몇 가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사망한 후 곧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를 운반하던 영구차에 8세의 아이가 치여 죽기도 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검사한 두 의사 중 한 사람인 더글라스 데리 교수는 1925년에 죽었다. 또 한 사람의 의사인 앨프리드 루카스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이집트 학자인 라플 교수와 화이트 교수도 의문의 자살을 하고 말았다. 카나본 경의 비서와 발굴 당시 초청 인사였던 사람들도 모두 죽어갔다. 모두 하나 같이 원인 불명의 병이나 사고로 죽어갔다. 과연 편안히 잠든 어린 파라오를 깨워 그의 저주가 실현된 것인가?

카이로 박물관의 고대 유물 부분의 책임자 네레트 박사는 '저주'라는 말을 일축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인생의 전부를 파라오의 묘와 미라 연구에 바쳤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저주가 근거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레트 박사는 그 말을 한 지 4주일 후에 폐허탈로 급사했다. 1969년,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대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애덤슨이 영국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은 한 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 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또한 그 사고 이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도 등뼈를 다쳤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가정에 닥친 모든 불행이 파라오의 저주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1972년 투탕카멘의 유물을 영국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수송 작업을 지휘하던 가멜 메레즈도 파라오의 어리석은 전설을 믿지 않는다고 공언한 후 그 날 밤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물들을 영국으로 운반하는 일을 맡았던 6명은 그 후 5년 사이에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며 지금까지 약 30여명이 파라오의 저주로 사망하였다.

발굴단의 사인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3000여 년 동안 벽에 붙어서 기생하던 곰팡이 혹은 박테리아가 공기를 통해 사람의 폐로 들어 왔기 때문이라던가 무덤 안의 강력한 독이 피부에 스며들어 죽었다는 등의 주장이 있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완벽하게 뒷받침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방사선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묘지 바닥이 우라늄을 포함한 돌이거나 아니면 방사선을 내는 바위로 무덤의 끝손질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 역시 문제점이 있었다.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 발굴에 관련된 1500여명 가운데 10년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 자연사했거나 발굴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조차 파라오의 저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증거로는 무덤의 개봉 당사자인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하였다.

사실 파라오의 저주가 존재한다면 제일 먼저 사망했어야 할 사람이 바로 카터였다. 또한 카터와 카나본 경과 함게 무덤을 열거나 유물을 옮겼던 사람들도 평균 26년 후에 사망하였다.
파라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언론계와 카나본 경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카나본 경은 발굴 자금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런던의 신문인 타임즈지를 상대로 발굴에 성공할 경우 모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는 약속을 하고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엄청난 특종을 눈 앞에 두고도 다른 신문사를 거쳐야 기사를 쓸 수 있었던 전 세계 언론의 거샌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카나본 경이 일찍 죽게 되자 감정이 좋지 않던 언론에 의해 '저주'는 과대포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파라오의 저주는 우연의 일치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보다. 파라오의 저주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최영장군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남기신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최영장군은 고려말의 충신으로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으며, 1361년에는 홍건족들이 고려땅을 침범하자  토벌하였고  1376년 왜구가  남해안을  침략하자  토벌한 역대 명장이고 고려를 위래 죽은 충신중의 충신이시기도 하죠.

다음은 북한에서 발행한 최영장군 우표입니다.

애국명장의 칭호를 붙여서 만든 우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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