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린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인 ‘고려장’.

우리는 이 이야기가 엣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믿어 왔는데요, 이것이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닌 중국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 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이 고려장을 우리나라 고려시대 이야기로 둔갑시켜, 이를 이용하여 문화재를 훔쳐가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 MBC 서프라이즈를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부분 아시는지?

우리는 여지 껏 고려장이 우리의 풍습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이 강해 장례 풍습으로 매장과 화장이 기본 풍습으로 유행했던 시절입니다.



신분이 높은 왕족은 생활도구와 보물을 함께 묻는 순장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인 고려도경에는 일부 하위계층에서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시체를 산에 그대로 방치하는 풍장을 치뤘다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부모님을 산채로 버렸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고려장으로 착각했을까요? 아니지요...

고려장이라는 말은 언제 처음 나온 것인지에 대해 MBC 서프라이즈는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책을 찾아 냅니다. 이는 ‘은둔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하였고,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엄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윌리엄 그리피스는 한국에 가본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사 활동을 한 그리피스가 조선에 대해 들은 소식통이라고는 일본인들에게 들은 것이 전부라고 하는데요.

우리는 심지어 이 고려장 이야기를 통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까지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후 일본인들이 쓴 여러 책들에서 고려장 이야기가 마구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인데요.

이중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동화집’과 일본인 미와 타마키가 저술한 ‘전설의 조선’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또 발견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유래가 된 것인지… 이 이야기는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매우 궁금하여 더 자세히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에 실린 원곡 이야기와 내용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원곡이야기에서 썼던 수레가 고려장에서 지게로 바뀐 것만 빼고 모든 내용이 동일합니다.

즉, 고려장은 중국의 전설을 우리나라 것인 양 둔갑시킨 일본에 의해 각인된 것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일본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요?

고려장이 등장한 시기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즉,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떨어뜨리고 열등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에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있었다고 퍼트린 것입니다.

도대체 왜? 왜 이러한 이야기를 퍼트렸을지 MBC 서프라이즈는 더 자세히 파해칩니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무덤을 도굴하기 위한 일본의 꼼수인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강탈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죽을 때 그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을 같이 묻는 순장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무덤을 파서 도굴을 할 생각을 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교주의가 국가 전체에 퍼져있는 조선시대에 무덤을 판다는 것은 큰 죄악처럼 여겨졌던 시대에, 도굴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역사를 날조하여 도굴을 할 명분을 만들었는데… 그 날조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고려장이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언론이 탄압받던 시절…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만행을 보도하게 됩니다.

 

화랑도의 기본정신은 세속오계입니다.

 

세속오계는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을 의미합니다.
이 세속오계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습니다

사군이충 -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김.
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기기를 효도로써 함.
교우이신 - 벗과 벗 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함.
임전무퇴 - 싸움에선 절대 물러나지 아니함.
살생유택 -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아니함.

《삼국유사》에는 ‘무리를 뽑아서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을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 대요(大要)를 삼는다’라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처음에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거용(擧用)하려 하였다’ 하고, 이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서로 가악(歌樂)으로 즐겁게 하며, 명산과 대천(大川)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으며, 이로 인하여 그들 중에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그 중의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고 그 설치목적과 수양과정을 적고 있습니다.

이로써 화랑도의 설치는 인물을 양성하여 그 가운데 인재를 가려서 국가에 등용함을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소기(所期)의 성과에 대해 《삼국사기》는 ‘현좌(賢佐:賢相)와 충신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합니다. 그 설치연대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이라 하였으나, 562년에 이미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대야성(大耶城:高靈)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신라는 이때에 이르러 이전부터 있었던 미비된 상태의 청소년 집단이던 화랑도를 국가조직 속에 편입시켜 무사단의 성격으로 강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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