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명낙가사는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래된 사찰이라고 합니다. 등명낙가사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명 정동진리 괘방산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시대 7세기(선덕여왕시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625로 인하여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이 지역의 대표적 사찰로 통한다고 합니다.

등명낙가사를 자주 찾는 이유 중의 하나는 등명낙가사 오백나한전 밑에 등병감로약수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곳 약수 물은 모든 병을 고치는데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만병통치약인가봅니다.

맛은 약간 찝찔합니다.
물어보니 철분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라는데, 몸에 좋다고 합니다.

많은 신도들은 등병감로약수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이에 따라 절을 올리고 시주를 합니다. 이는 매우 신성한 것으로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등명낙가사를 찾았던 시간이 오후 4시 쯤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명낙가사의 진정한 묘미는 동해의 일출과 월출을 맛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늦은 시간 또는 아침 일찍 이곳에 방문하여 일출 또는 월출을 맛보고 싶군요.

주변에 경포대해수욕장, 정동진을 찾으면서 이곳을 찾는 것도 한 묘미인것 같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진평왕이 승하했는데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의 딸인) 덕만(德曼:선덕여왕)을 왕으로 세웠다”라고 썼고, 일연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고 쓴 이래 이 설명이 정설이 되어왔다.

한 마디로 선덕여왕은 성골의 핏줄 때문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단지 성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국왕이 되었음을 전해준다.

또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진평왕의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에게는 천명(天明)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신라 제27대 왕,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 성 김(金), 휘(諱) 덕만(德曼),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신라뿐 아니라 기록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인데, 덕만은 불교식 이름으로 『열반경』에 등장하는 오계를 갖춘 재가 여신도이며 부처의 열반을 지켜보았다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이고 어머니는 복승갈문왕의 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며 자매로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혼인하여 김춘추를 낳은 천명부인이 있다. 또한 ‘서동요’설화에서는 백제로 가서 무왕의 비가 되었다고 하는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셋째딸이라 하여 선덕여왕의 자매로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 기록을 믿기 어려운 점은 또 있다. 즉, 진평왕의 딸이 세 명으로 정사 기록대로 첫째 딸이 선덕여왕이고, <삼국유사> 말대로 셋째가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면 둘째 딸이 선덕여왕 다음 왕으로 즉위해야하나, 그 어떠한 말도 없다는 점이다. 선덕여왕 다음으로 왕이 되는 승만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 아니라 덕만(선덕여왕)과 4촌이라는 점이다. 고로 선화공주가 진평왕 셋째 딸이라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기이편(奇異編) 설화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상 여왕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외에 두 명이 있었다. 제28대 진덕여왕(647~654), 그리고 통일 신라 말기에 해당하는 제51대 진성여왕(887~897)이다. 이 세 여왕은 모두 신라의 여왕이다. 고구려, 백제와는 다른 신라의 정치, 사회적 특징은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여왕의 존재를 낳게 한다. 먼저, 그 이유가 바로 신라사회에서만 존재했었던 골품제의 영향이다. 원래 신라의 왕위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만 하는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으로 성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7세기에 들어서면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성골남자가 없다는 것은 성골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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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예지력을 가지고 있엇다고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첫번째 설화(일화) '향기 없는 모란꽃'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과 모란꽃씨가 있었는데..
모란꽃 그림에 나비나 벌이 없음을 알고 모란씨에..
향기가 없음을 진작 알고 있었고..
그 모란꽃씨를 심으니까.. 역시나 향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어떻게 맞추었냐고 하니까..
꽃그림에 나비가 없었다고 하고 그것은 곧 자신을 풍자한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옵니다..

 

두번째 설화(일화) '개구리 이야기..'

이것과 향기없는 모란꽃 은  삼국사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데요...
다만 모란꽃 이야기는 자신의 아버지 진평왕에게 말햇고..
개구리 이야기는 여문곡이 아니라 옥문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쳣다고 하네요..
겨울에 겨울잠을 자고 있을 개구리가..
3~4일을 계속울자.. 그곳에 적군이 숨어있다는 징조임을 알고..
군사들을 풀어 그곳을 뒤지게 하자
과연 백제군이 숨어있어. 물리쳣다고 하네요..
여기가 여문곡으로 나와있는데.. 진짜로는 옥문곡이라고 합니다..

 

세번째 설화(일화)

선덕여왕이 자신이 죽을 때는 자기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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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하철에서 찍은 광고다.

선덕여왕 캐릭터

모델이 입고 있는 옷에 나온 여자 캐릭터는 노랑머리...

그러나 광고에서는 선덕여왕 캐릭터 티셔츠라고 그런다...

 

좀 이상한거 아닌가?

간만에 나들이... 월정사를 들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보았다.

여름날의 3일 연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았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때마침 영가천도제를 한다는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다.

이게 바로 그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다.

자장율사라는 분이 만들었고,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건립되었다.

산꼭대기 까지 올라가는데 그리 힘이 들지는 않았으나 가자마자 보이는 우물가에 사람들은 모여든다. 실수(약수)라는 팻말이 써 있어 마음 놓고 한모금씩 들이킨다.

주변 건물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게 뭬야~ 라는 둥... 이야기를 나눈다.

돈을 내면 기왓장에 자기 이름과 소원을 적을 수 있다.

그런데 이날은 비가 와서 그런지 소중한 이야기를 적은 기왓장이 깨지고 망가지고... 그러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과히 유쾌한 장면은 아닌듯 싶다.

하나 더 짓고 있는 건물은 아예 지붕이 금색이다.

여기저기 건물을 더 확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후세에 더 웅장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그러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진 한장 찰칵-

이날 비가 와서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았는데, 실제로도 평범한 절의 모습 외에는 사진 찍을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그저 돌 사진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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