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98년 고려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일으킨 노비해방운동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난을 일으킨 만적은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고 스스로 공경대부가 되자고 주장하며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신 집권기 때 하극상 풍조가 유행하고, 노비들의 고통이 어느 때보다 심한 것이 이 사건의 발단으로 생각 됩니다.

만적은 다른 사노비들과 함께 개경의 뒷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처음으로 난을 일으킬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림]본 사건과 유사한 소재를 다룬 KBS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라고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만적을 비롯 가른 노비들이 합심하여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사노 순정이 이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사전에 발각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는 배신자가 꼭 나오는군요.

중간에 이런 밀고로 인하여 만적과 이를 따른 수백명의 노비들은 체포되어 강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한편, 반란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銀) 80냥(兩)을 상금으로 받고, 또 양민(良民)으로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閤門祗候)라는 높은 관작을 받았습니다.

계백장군은 당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는데,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렀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게 되는데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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