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봉산갈비 031-217-6066 영통구청 옆

2. 항아리보쌈 031-224-0777 영통구청 옆

3. 양대창구이 전문점 양산박 031-214-9285 영통구청 옆

4. 싱글벙글 복어 매탄점 031-216-5007 영통구청 옆

5. 고구려(경복궁2) 031-205-2255 영통(홈플러스) 근처

6. 동해바다 031-213-7700 영통구청 옆

7. 두부 전문 요리점 삼대째손두부 막걸리+두부김치 031-211-9033 첨기연 근처

장수왕은 고구려 20대 왕이며 향년 98세(394년~491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고 하였고 중국의 진(晉)나라·송(宋)나라·위(魏)나라 등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며 북아시아 여러 세력들과도 다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서방(西方)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외교관계를 기반으로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습니다.

연대별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408년 태자로 책봉

414년 자신의 아버지인 담덕(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움

427년 만주 지방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함

475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여 옛날 고국원왕의 원한을 갚음.

480년 말갈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함

광개토대왕 장수왕 2대에 걸친 정복사업으로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재위 79년, 나이 98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수왕의 업적 요약
1.도읍지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김
2.남하정책으로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넓힘

한반도를 호령했던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의 연대별 업적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374년 탄생, 이름은 담덕
386년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됨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이 됨, 고구려 최초로 연호(영락)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고 관미성도 함락됨
392년 백제 북쪽 10개의 성(황해도지역)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함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진무가 이끄는 백제1만대군을 막아냄.
394년 고구려 남쪽의 수곡성이 위기에 쳐했으나, 정예기병을 보내 막아냄
396년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함
398년 숙신을 정복하고 신라를 굴복시킴. 이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침.
399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친입. 이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왜와 백제를 격파    
        고구려군이 남쪽에 있는동안 침략해온 북쪽의 후연군에 반격을 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회복함.
404년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함.
405년 요동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6년 목저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7년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킴.
410년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함.
412년 39세의 나이로 사망.

산상왕(山上王)은 고구려 10대왕(재위 197-227)입니다. 산상왕은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위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으나 삼국지 등의 중국 기록에 의하면 위궁은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을 가르키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산상왕은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합니다. 우 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다시 왕후에 올랐다. 형수를 아내로 다시 맞이하다니, 지금 보면 참으로 웃기는 가족사입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며,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發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발기는 결국 요동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뒤이어 발기가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하였고 결국 계수가 발기의 군대를 물리치자 발기는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산상왕은 198년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고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208년 겨울 음력 11월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后女)라는 20세 가량의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으며, 후녀는 아들 교체(郊彘)를 낳았습니다.
후녀는 소후(小后)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또한 217년에는 후한(後漢)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으며, 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고, 227년에 서거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에게는 44명정도의 아들이 있는데 이중 역사책에 많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명정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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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풍(扶餘豊, 630경? ~ 669년)

백제의 제32대왕 백제 풍왕(豊王)(660년~661년)이고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합니다.

부여풍은 볼모로 왜(일본)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자,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60년 의자왕 외 2천 귀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백제로 왔습니다.

이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등의 내분이 발생하자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 부흥연합은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세력 또한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여풍은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를 하였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선광(善光 또는 禪廣 : 일설에는 동생이라고 함)은 일본에 남았으며,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2)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부여륭. 615~682)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며 644년(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습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습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司稼卿)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저항하는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3) 부여용 (扶餘勇) 생몰년 미상.

백제의부흥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663년 9월의 이른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왜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의 패전 후 고구려로 망명한 형인 부여 풍(扶餘豊)과 내응(內應)하면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는 664년 4월에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백제유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고구려 정벌을 위한 후고(後顧)를 덜기 위하여 관계개선을 시도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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