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역사를 바꾼 한통의 전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래 역사채널 내용을 감상 해 보아요.

1896년 역사를 바꾼 한통의 전화

1896년 역사를 바꾼 한통의 전화

그 당시 전화는 보편화된 통신 수단이 아니었을 텐데… 전화 한통이 한 청년의 목숨을 구했군요.

발명왕 에디슨이 어떠한 업적을 이룩했는지… 아시나요?

보통 에디슨 하면 발명을 많이 했고,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에디슨이다… 정도입니다.

 

1. 발명왕 에디슨의 업적을 살펴 봅시다.

에디슨은 특허를 받은 것만도 1천 종이 넘는 발명왕으로,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1876년 탄소 마이크로폰으로 벨이 발명한 전화를 실생활에서 쓸 수 있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축음기를 발명하여 전세계에 그의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1879년에는 전등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필라멘트가 빛을 내는 백열등을 개발하였습니다다. 이어 에디슨은 가정에서 백열등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중앙 발전소를 세워 각 가정과 회사에 전력을 공급했습니다.

1882년 뉴욕에 처음으로 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보다 쉽게 가정에 보내도록 했으며, 이후 전 세계의 여러 도시에 많은 발전소를 세웠습니다.

에디슨은 영화 분야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1891년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헐리우드를 에디슨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는 이 밖에도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에디슨이 마지막으로 특허를 받은 것은 국화과 식물인 미역취에서 뽑은 물질로 합성 고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나이키 운동화의 조상이 바로 이 고무인것 같습니다.

 

 

2. 에디슨의 주요 발명품을 연대별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식시세표시기(1869년)
   2. 틴포일(1878년)
   3. 전구(1880)
   4. 커피포트(1880)
   5. 영사기(1888)
   6. 전기선풍기(1890)
   7. 에디슨 헤어 컬링(1890) 지금의 고데기
   8. 토스터기(1905)
   9. 전기난로(1918)
   10. 에디슨 와플기
   11. 전기히터(1920)

 

3. 에디슨이 남긴 교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에디슨이 청소년 시절에 열차에서 신문판매를 하며 어렵게 살았던 것 다 아실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의지

- 백열전등 실험을 1000번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린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인 ‘고려장’.

우리는 이 이야기가 엣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믿어 왔는데요, 이것이 우리나라 이야기가 아닌 중국 이야기라는 것을 밝혀 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본이 고려장을 우리나라 고려시대 이야기로 둔갑시켜, 이를 이용하여 문화재를 훔쳐가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이 MBC 서프라이즈를 통해 방송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부분 아시는지?

우리는 여지 껏 고려장이 우리의 풍습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고려장은 고려의 장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이 강해 장례 풍습으로 매장과 화장이 기본 풍습으로 유행했던 시절입니다.



신분이 높은 왕족은 생활도구와 보물을 함께 묻는 순장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인 고려도경에는 일부 하위계층에서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시체를 산에 그대로 방치하는 풍장을 치뤘다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부모님을 산채로 버렸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고려장으로 착각했을까요? 아니지요...

고려장이라는 말은 언제 처음 나온 것인지에 대해 MBC 서프라이즈는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책을 찾아 냅니다. 이는 ‘은둔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하였고,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엄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윌리엄 그리피스는 한국에 가본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사 활동을 한 그리피스가 조선에 대해 들은 소식통이라고는 일본인들에게 들은 것이 전부라고 하는데요.

우리는 심지어 이 고려장 이야기를 통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교훈까지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후 일본인들이 쓴 여러 책들에서 고려장 이야기가 마구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인데요.

이중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동화집’과 일본인 미와 타마키가 저술한 ‘전설의 조선’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또 발견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유래가 된 것인지… 이 이야기는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매우 궁금하여 더 자세히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에 실린 원곡 이야기와 내용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발견됩니다.

원곡이야기에서 썼던 수레가 고려장에서 지게로 바뀐 것만 빼고 모든 내용이 동일합니다.

즉, 고려장은 중국의 전설을 우리나라 것인 양 둔갑시킨 일본에 의해 각인된 것임이 밝혀집니다.

그런데 일본은 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요?

고려장이 등장한 시기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즉,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떨어뜨리고 열등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에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있었다고 퍼트린 것입니다.

도대체 왜? 왜 이러한 이야기를 퍼트렸을지 MBC 서프라이즈는 더 자세히 파해칩니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무덤을 도굴하기 위한 일본의 꼼수인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강탈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죽을 때 그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을 같이 묻는 순장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무덤을 파서 도굴을 할 생각을 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교주의가 국가 전체에 퍼져있는 조선시대에 무덤을 판다는 것은 큰 죄악처럼 여겨졌던 시대에, 도굴은 해서는 안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역사를 날조하여 도굴을 할 명분을 만들었는데… 그 날조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고려장이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언론이 탄압받던 시절…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만행을 보도하게 됩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연대별 활약 사항을 정리 해 보았습니다.

1335년 (충숙왕 복위 4년)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의 차남으로 출생
1356년 (공민왕 5년)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내부하여 유인우의 쌍성총관부 공략에 내응하여 공을 세움
1361년 (공민왕 10년) 박의의 반란을 토벌
1362년 (공민왕 11년) 홍건적의 2차침입에 맞서 싸워 동북면병마사로 승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격퇴
1364년 (공민왕 13년) 최유가 공민왕을 몰아내기 위해 침입한 것을 격퇴
                             여진족의 침략 격퇴
                             밀직부사, 익대공신에 책록
1368년 (공민왕 17년) 동북면원수, 문하성지사에 임명됨
1372년 (공민왕 21년) 화령부윤이 됨
1377년 (우왕 3년) 서강부원수로써 왜구를 격퇴
1380년 (우왕 6년) 양광, 전라, 경상도순찰사로써 운봉에서 왜구를 소탕
1382년 (우왕 8년) 찬성사로써 동북면도지휘사가 됨
1383년 (우왕 9년) 이지란과 함께 호바투의 군대를 격퇴
1384년 (우왕 10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가 됨
1385년 (우왕 11년) 함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1388년 (우왕 14년/창왕 원년) 명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최영 등의 명령으로 우군도통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명을 치러 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위화도 회군') 우왕과 최영, 권신 염흥방, 임견미 등을 죽이고 창왕을 세웠으며 수시중으로써 도총중외제군사에 오름
1389년 (창왕 2년/공양왕 원년)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폐위, 공양왕을 즉위시킴
1390년 (공양왕 2년) 삼사영사로 승진
1391년 (공양왕 3년) 삼군도총제사로써 전제개혁 단행
1392년 (공양왕 4년/태조 원년) 구신 세력의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을 건국
1394년 (태조 3년)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
1398년 (태조 7년) 제 1차 왕자의 난, 5째아들 이방원이 세자인 막내 이방과와 그의 동복형제 이방번을 죽임. 이에 태조가 왕위를 세자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정종 즉위) 상왕이 됨
1400년 (정종 3년/태종 원년) 이방원이 즉위하여 태종이 되자 (태종 즉위) 태상왕이 됨
1402년 (태종 3년) 동북면에 가서 오래 머물다 돌아옴 불가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냄
1408년 (태종 9년) 사망하여 건원릉에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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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성계의 업적을 몇 가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대정책 : 조선왕조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 숭유억불, 중농억상 정책 지향
2) 국호제정 : 고려의 그늘을 벗어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국호를 조선으로 정함(1393년)
3) 한양천도 :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김(1394년)
4) 통치규범 : 정도전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 편찬케 함
5) 명나라와 <금인.고명>문제로 한때 북벌 계획

장수왕은 고구려 20대 왕이며 향년 98세(394년~491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이라고 하였고 중국의 진(晉)나라·송(宋)나라·위(魏)나라 등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으며 북아시아 여러 세력들과도 다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서방(西方)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외교관계를 기반으로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습니다.

연대별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408년 태자로 책봉

414년 자신의 아버지인 담덕(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움

427년 만주 지방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함

475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여 옛날 고국원왕의 원한을 갚음.

480년 말갈의 군사와 함께 신라 북부를 공략하여 고명성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동쪽의 죽령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랴오허강 이동의 만주지방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함

광개토대왕 장수왕 2대에 걸친 정복사업으로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재위 79년, 나이 98세로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수왕의 업적 요약
1.도읍지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김
2.남하정책으로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넓힘

한반도를 호령했던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의 연대별 업적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374년 탄생, 이름은 담덕
386년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됨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이 됨, 고구려 최초로 연호(영락)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고 관미성도 함락됨
392년 백제 북쪽 10개의 성(황해도지역)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함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 진무가 이끄는 백제1만대군을 막아냄.
394년 고구려 남쪽의 수곡성이 위기에 쳐했으나, 정예기병을 보내 막아냄
396년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함
398년 숙신을 정복하고 신라를 굴복시킴. 이 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침.
399년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친입. 이에 따라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왜와 백제를 격파    
        고구려군이 남쪽에 있는동안 침략해온 북쪽의 후연군에 반격을 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회복함.
404년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함.
405년 요동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6년 목저성을 공격한 후연의 모용희 군대를 격퇴.
407년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킴.
410년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함.
412년 39세의 나이로 사망.

산상왕(山上王)은 고구려 10대왕(재위 197-227)입니다. 산상왕은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위궁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으나 삼국지 등의 중국 기록에 의하면 위궁은 산상왕이 아닌 동천왕을 가르키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산상왕은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다고 합니다. 우 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어 다시 왕후에 올랐다. 형수를 아내로 다시 맞이하다니, 지금 보면 참으로 웃기는 가족사입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며,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發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발기는 결국 요동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뒤이어 발기가 요동 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쳐들어 오니 왕은 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막게 하였고 결국 계수가 발기의 군대를 물리치자 발기는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산상왕은 198년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고 203년에는 국상 을파소(乙巴素)가 죽어 고우루(高優婁)를 후임 국상으로 삼았다. 209년에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208년 겨울 음력 11월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后女)라는 20세 가량의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으며, 후녀는 아들 교체(郊彘)를 낳았습니다.
후녀는 소후(小后)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또한 217년에는 후한(後漢) 평주(平州)의 하요(夏瑤)가 1천여 가(家)를 거느리고 투항하였으며, 왕은 책성(柵城)에 이들을 안치하였고, 227년에 서거하니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고조선은 기원전(BC) 2333년에 설립되어 기원전 108년까지존재한 우리나라의 첫 국가입니다.

고조선의 발자취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 건국
기원전 2000년  후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 3,4문화층 형성
                     부분적으로 만주지방에서 청동기 문화 시작
기원전 1400년  부산 동삼동유적 5층 영도기 형성
기원전 1300년  부산 금곡동 조개더미,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유적 등 제3기 유적형성
기원전 1200년  동이가 은나라에 회화와 태산 일대로 진출
기원전 1122년  은나라에 기자가 조선에 들어옴. 8조법 제정
기원전 1000년  농경문화 이룩, 전기 청동기 문화 형성
기원전 850년    은령 남산근유적 형성
기원전 800년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으로 정함.
                     이후 송화강 유역에 부여, 한반도 중남부에 전국 성립
기원전 700년   고인돌 유적 및 청동기 유적 형성. 철기문화 시작
기원전 600년   정가와자유적, 덕은리주거지유적, 회령 오동유적 등 형성
기원전 500년   윤가촌유적 하층 1기문화 형성. 남제주 삼모리조개더미,
                     광주 송암동주거지 유적 형성
기원전 450년   송화강 상류 일대에 부여 성립
기원전 403년   전국 성립
기원전 400년   철기문화 들어옴. ‘전국’의 이주민이 서부 일본에 진출
기원전 350년   신평 선암리유적, 진양 대평리유적 형성
기원전 310년   승주 오봉리고인돌유적, 제주 오라동지석묘 등 형성
기원전 300년   중국의 연나라가 요동에 장성을 축성하여 기자조선(고조선)과 국경을 삼음
기원전 221년   진나라 중국 통일로 회하 방면에서 동이의 활동 중단
                     조선후로 고조선왕을 칭함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 서방을 침공하여 2,000여리를 강점
기원전 214년   고조선 부 왕으로 즉위, 진의 장성공사가 요동의 이름
기원전 209년   고조선의 준왕에게 연나라, 제나라의 수만호가 피난 옴
기원전 203년   맥족의 기병이 한나라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
기원전 202년   기자조선(고조선)이 패수를 한나라와의 경계로 삼음
기원전 200년   해모수설화, 금와설화 성립
기원전 195년   기자조선(고조선)의 요동의 위만이 망명해 옴
                     준왕이 박사로 삼음
기원전 194년   위만이 왕검성 공략, 위만조선(고조선) 건국.
기원전 190년   위만왕이 진번, 임둔을 복속시킴
기원전 175년   철기 문화 형성
기원전 149년   한국식동검 형성
기원전 128년   예군과 남려가 호구 28만을 데리고 한나라 요동군에 귀부.
                     그 땅에 청해군 설치
기원전 125년   철기, 목곽묘 문화 형성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고조가 고조선 침공, 고조선 멸망.

이자겸의 난은 1126년(고려 인종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자겸은 대대로 할아버지때부터 고려왕실의 외척으로 급성장한 가문이었습니다.

이자겸의 딸이 낳은 아들이 바로 고려 인종입니다.
또한 이자겸에게는 많은 딸들이 있어서 인종에게는 또 다른 이자겸의 딸이 시집을 갔기 때문에 인종에게 있어 이자겸은 외할아버지 이면서 장인이 되는 지금으로서는 좀 이상한 족보가 됩니다.

 이자겸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되었고 결코 고려 임금인 인종 조차도 그를 견제하기 힘들정도로 그의 권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려인종은 뜻있는 세력들을 모아서 이자겸 세력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치밀하지못한 계획으로 인해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꼴이 됩니다.
이자겸의 사람 일부가 죽임을 당했을뿐 완전히 축출하지못하였고, 오히려 고려인종이 왕위에 크나큰 위협을 당하게됩니다. 궁을 모두 걸어잠궈 항전했고, 이자겸은 궁에 불을 지르기에 이릅니다.

이후 이자겸의 반대세력들은 이자겸에 의해서 숙청되었고, 임금인 인종마저도 왕위가 어찌될지 모를 정도로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결국 이자겸에 의해서 이자겸의 집에 연금당하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이자겸은 이로서 만족하지 않고 호시탐탐 인종을 시해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합니다.

당시 이자겸을 타도하고자하는 세력들이 모여들었고 이자겸에게는 척준경이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한날은 이자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가 시비가 붙었고 서로 주인을 들먹이며 싸웠다합니다.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는 벌어지게되었고 이것을 인종이 알아차리고 척준경을 몰래 불러 이자겸을 축출하도록 이간질을 하게되었던것이죠
.
임금이 명하는 그리고 인종이 출세길을 보장하니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하고 이자겸을 끌어내리게 됩니다.
이후 이자겸은 귀양을 가게되었고 척준경은 훗날 처벌을 받게되었구요.


이자겸이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조기의 맛에 반해 임금님께 진상하면서 굴비가 알려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는데 외세를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금나라가 강성해졌고 이자겸은 괜히 금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의 권력을 잃을것을 염려하여 금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은 1198년 고려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일으킨 노비해방운동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난을 일으킨 만적은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고 스스로 공경대부가 되자고 주장하며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신 집권기 때 하극상 풍조가 유행하고, 노비들의 고통이 어느 때보다 심한 것이 이 사건의 발단으로 생각 됩니다.

만적은 다른 사노비들과 함께 개경의 뒷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처음으로 난을 일으킬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림]본 사건과 유사한 소재를 다룬 KBS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라고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만적을 비롯 가른 노비들이 합심하여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사노 순정이 이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사전에 발각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에는 배신자가 꼭 나오는군요.

중간에 이런 밀고로 인하여 만적과 이를 따른 수백명의 노비들은 체포되어 강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한편, 반란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銀) 80냥(兩)을 상금으로 받고, 또 양민(良民)으로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閤門祗候)라는 높은 관작을 받았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 외 사람들이 지은 역사서로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다룬 역사서입니다.

김부식은 신라 김씨의 자손으로, 신라를 위주로 서술하였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건국된 시기가 제일 앞서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나 혹은 중국의 사서를 볼 때 고구려, 백제가 건국시기가 앞설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김부식이 신라를 중요시하여 왜곡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된 역사서입니다.
기전체는 본기, 세가, 열전, 연표, 등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기전체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서 본기는 황제국의 역사,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 열전은 왕들 외의 인물들의 전기라고도 합니다.
조선 때의 고려사를 편찬한 것을 보면, 고려는 제후국이라 해서 세가에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보다는 주체적인 인식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본기로 썼습니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무신정변 이후의 혼란한 사회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을 찾는 것을 시발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의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문화적 배경이 고려사회 전반에 전개되고 있던 데에 그 토양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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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민족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외세의 압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사관적 역사의식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사관을 강하게 반영하는 사서가 삼국유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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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는 김부식이 편찬한 책으로 신라 계승의식을 반영하고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쓴 역사책입니다.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조선 및 삼한의 비기록, 삼국사(신라중심) 내용입니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저술한 책으로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여 고유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여 저술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습니다.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단군부터 고려말 충렬왕 때까지 기록하였으며 신라 관계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책의 공통점으로는 쓰여진 시점이 고려시대라는 것이 같습니다. 자세하게는 삼국사기는 고려중기, 삼국유사는 고려말기입니다..

단군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建國神話)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국조전설(國祖傳說)이라고도 합니다.

원시시대부터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말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의 제1권 고조선 조(條)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위서』(魏書)에는 단군 임금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으니 중국 요(堯)와 같은 시대(B. C. 2333)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할 때,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보아 홍익인간(弘益人間 :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할 만하다 생각하여 그들에게 천부인(天府印) 3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여러 신들과 세상을 다스렸다고 하는데요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하여 환웅은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참을성 많은 곰만이 100일을 견뎌내 사람이 되었고(熊女),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이라는 것입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뒤에 아사달에 천도하여 1,500년 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단군 신화는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도 나타났습니다. 단군 신화의 사상은 상고(上古)의 민간 신앙에서 나오는 것으로 선왕당(仙王堂)ㆍ천왕당(天王堂)ㆍ산신당(山神堂) 등 천신숭배ㆍ산신숭배의 사상과 합치되어 있습니다. 단군 숭배 사상은 고려 충렬왕 무렵에 원(元)에 대한 자립 의식으로부터 싹터, 조선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동명왕(東明王)과 더불어 추앙하였으며, 구한말 자주 독립사상이 고조될 때 발생한 대종교(大倧敎)ㆍ단군교(檀君敎)의 성립 배경이 되었습니다.

유교, 불교, 선교(仙敎:道敎)의 유입 이후 단군 신화의 사상을 3교의 모태로 보기도 하며,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환검(檀君)을 3신(三神)이라 하는 삼신사상이 싹트기도 하였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독립운동가 입니다.

본관은 고흥.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아버지 중권,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분의 찬란했던 발자취를 돌아 보도록 합시다.

1904년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 지령마을에서 유중권의 딸로 태어남.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됨. 

1911년 아버지가 천원에 흥호 학교를 세움. 

1915년 아버지가 일본인 고마다에게 매를 맞고 자리에 누움. 

1916년 기독교 감리교 공주교구 미국인 선교사 부인의 도움으로
          사촌언니 애다가 다니는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함.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주위의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줌.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 되어 ‘잔 다르크’, ‘나이팅게일’ 전기를 읽고 크게 감명받음.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남. 31독립 운동이 일어남.
           국현숙, 김희자, 유점선 등 5명과 함께 31운동에 참가하여 시위함.

1919년 3월 3일 조선총독부에서 휴교령을 내려 고향으로 돌아감.
          천안, 청주, 공주, 조치원, 진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 참가를 권유함.
          음력 2월 그믐달, 매봉산에 올라가 만세 운동을 알리는 횃불을 밝힘.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부모가 일본헌병의 총탄에 사망.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함.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음.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석방시키라는 여론이 빗발침.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석방시키겠다는 재판장의 말을 듣고 격분함.
          법정모독죄로 4년의 형이 추가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갇힘.
          감방 안에서 만세소동을 일으켜 독방에 갇힘.
          심한 고문으로 병들었으나, 함께 고생하는 동지들을 도와주고 격려함.

1920년 음력 3월 1일 낮 12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간수들에게 고문당함.
          고문으로 병이 심해져 병자가 있는 감방으로 옮겨짐.
          10월 12일 아침, 병든 몸을 일으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세상을 떠남.

 유관순 열사가 별세한 뒤 42년이 지난 1962년… 유관순 열사에게는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11년 7월 19일 미국 LA 한 도시의 극장… 이른 아침에 Dwards Stadum Cinema라는 곳에 들렀습니다.

저 큰 극장이 개구쟁이 스머프 밖에 상영을 안하더군요.

헤리포터 마지막편, 트랜스포머도… 스머프를 이기지 못하더군요.

2011년 7월 19일은 미국에서 스머프의 위력을 체감한 순간이었습니다.

1950.6.25 일요일 새벽4시 북한의 기습 남침
1950.6.26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북한 침략자 규정. 미국주도의 통합군사령부 설치(맥아더 사령관으로 유엔군 파견),북한의 의정부 점령
1950.6.27 남한 정부 대전으로 이동,북한군 서울 도심 진입
1950.6.28 북한군 서울 점령
1950.7.14 남한 정부 유엔군에 한국군 작전권 이양
1950.8월 인민군 낙동강 진격
1950.9.15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성공
1950.10.1 유엔군 38도선 회복
1950.10.2. 이에 긴장한 주은래(중국)는 미군이 38도선 넘으면 중공군을 출동시킬 것을 경고
1950.10.7 유엔군 38도선 돌파함(but, 유엔에서는 처음에 38도선 지역까지만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맥아더가 이를 무시하고 북으로 넘어감- 그리고 이후에 유엔에 사후 승인을 받음: 유엔의 이런 이유는 당시 국제적인 관계, 특히 중국에 대한 의식도 있었음. 그 우려는 다시 중공군 투입으로 사실로 드러남)
1950.10.10 원산, 17일 함흥, 흥남, 19일 평양 점령
1950.10월 하순 청천강 점령
1950.10.26 압록강변 초산 도달 → 이에 긴장한 중국은 항미원조 30만 군대 파병, 11월에는 소련의 미그기도 등장
1950.11.28 유엔군 전면 후퇴 결정
1950.12.3 맥아더 원자폭탄 사용 건의(이로 인해 맥아더 해임, 리지웨이 장군 임명)

1951.1.4 유엔군 후퇴, 평양, 흥남 철수
1951.6월 정전회담(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참석: 남한은 작전권이 없어 참석 못함): 이때 군사분계선 중립국감시기구 구성, 포로교환, 외국군 철수 등의 내용으로 회담을 여러차례 하지만 잘 되지 않음.. 1953년까지 정전협정이 계속되다가 1953년 휴전 상태가 됨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의자왕에게는 44명정도의 아들이 있는데 이중 역사책에 많이 서술되는 사람은 세명정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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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풍(扶餘豊, 630경? ~ 669년)

백제의 제32대왕 백제 풍왕(豊王)(660년~661년)이고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합니다.

부여풍은 볼모로 왜(일본)에 31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으로, 백제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자,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60년 의자왕 외 2천 귀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아들 선광을 일본에 남겨두고 백제로 왔습니다.

이 가운데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200여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복신이 승려 도침을 살해하는 등의 내분이 발생하자 부여풍은 복신을 살해하였습니다.

663년 결국 내분에 빠진 백제 부흥연합은 왜군을 동원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대항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그 세력 또한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부여풍은 이웃의 고구려로 도주를 하였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하며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선광(善光 또는 禪廣 : 일설에는 동생이라고 함)은 일본에 남았으며, 지토 천황(持統天皇)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2)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 부여륭. 615~682)

의자왕의 셋째 아들이며 644년(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회요》 (唐會要) 백제전에는 숭(崇)으로 되어 있습니다.

660년 나당동맹군의 공격을 받자 의자왕과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왕과 함께 곧 항복했습니다. 소정방(蘇定方)이 귀국하면서 의자왕을 포함한 대신들과 주민 1만여 명을  호송해 갈 때 당(唐)으로 압송되었다. 당에서 사가경(司稼卿)을 제수받았고,  662년 수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저항하는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하는 데 참가했습니다.

주류성이 항복하고 백제 저항군이 모두 진압된 뒤 당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3) 부여용 (扶餘勇) 생몰년 미상.

백제의부흥운동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663년 9월의 이른바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면서 왜군과 함께 나당연합군에 저항하다가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왜로 망명하였습니다.

백촌강의 패전 후 고구려로 망명한 형인 부여 풍(扶餘豊)과 내응(內應)하면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포착한 당나라는 664년 4월에 웅진도독부의 사신을 왜에 파견하여 백제유민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고구려 정벌을 위한 후고(後顧)를 덜기 위하여 관계개선을 시도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좌절되었다고합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33)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642년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빼앗았고, 이어 윤충(允忠)으로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을 함락시켜 성주인 품석(品釋)을 죽이는 등 신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당항성(黨項城:남양)을 빼앗아 신라가 당(唐)나라로 가는 입조(入朝)의 길을 막는 등 국위의 만회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성충 ·흥수 등 충신의 조언을 듣지 않고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 ·당(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계백(階伯)의 황산벌싸움을 마지막으로 백제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수도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이 나당 연합군에 포위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충남 공주)에 피신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였습니다.

그는 태자 등 1만 2000여 명과 함께 소정방(蘇定方)에게 끌려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죽음)하였다고 합니다.


사진: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의자왕과 계백장군

 

의자왕의 발자취를 연도별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32년 1월, 태자로 책봉됨
642년 2월, 사형수를 제외한 죄수들을 석방시킴
642년 7~8월,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킴
64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함
644년 7월, 왕자 융을 태자로 책봉함
645년 5월, 신라를 공격해 7개 성을 빼앗음
647년 10월,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함
648년 3월, 신라의 10여개성을 빼앗았으나 김유신에게 패배함
649년 8년, 신라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함
653년, 기근이 들고 왜국과 화친함
655년, 망해정과 마천성을 중수하고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함
660년, 백제 멸망 및 의자왕 사망

계백장군은 당시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했는데,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격파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렀다고 합니다.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게 되는데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唐)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때 당나라 고종(高宗)은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宴樂)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계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句踐)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吳)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의 결판을 내자”하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그들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습니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습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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